2026.01.14. 07:18
제목은 제가 어느 기업의 면접관에게 실제로 들었던 말입니다. 저는 그 말에 동의하지 않으니, 제게 화내지 말아주세요.
2025년 12월의 어느 날의 저는 생각 없이 이력서를 난사하다 어떤 기업의 연락을 받습니다. 해당 기업은 IT기업이 아니며, 기업 사이트 운영, 고객 응대, 간단한 HTML/CSS 수정, 외주 개발사와의 소통 업무를 맡을 사람을 구하고 있었습니다. 이 공고를 웹 프로그래밍 태그로 올린 것부터 미스지만, 저도 공고를 다 읽지 않고 태그만 보고 지원했으니 이 부분은 넘어가겠습니다.
면접 도중 무리한 요구를 하는 고객을 응대한 적 있느냐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저는 게시판 기능이 포함된 웹 애플리케이션을 이틀 안에 만들어달라고 요구했던 외주 고객에게 해당 요구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이유를 차분하게 설명했다고 답변했습니다. 그러자 면접관이 이런 말을 합니다.
“그누보드로 몇 시간 안에 게시판 하나 만들 수 있는데… ㅎㅎ”
그렇습니다. 제목은 순화해서 적은 것이고, 실제로는 ‘나도 몇 시간만 있으면 할 수 있는 일인데, 개발자라면서 이틀 안에도 못 만드나?’라는 의미를 내포한 조롱을 들었습니다. 이 글은 그 발언의 논리적 허점을 짚는 글입니다.
Ⅰ. “게시판”이라는 말에 생략된 전제
우선, 면접관은 너무 많은 전제를 생략하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게시판을 만든다고 하면, 단순히 게시판, 게시글, 게시글 작성 페이지, 이렇게 세 가지 페이지를 뚝딱 만들면 되는 것처럼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개발자 입장에서 게시판은 단순한 페이지가 아닙니다. 개발자는 다음과 같은 전제를 생각해야 합니다.
구현에 대한 전제
권한과 보안에 대한 전제
운영에 대한 전제
‘게시판’이라는 말에는 아무런 정보값이 없습니다. 이를 무시한 채 “게시판 하나 만드는 데 그렇게 오래 걸리느냐?”라는 질문만으로는 어떤 논의도 진행할 수 없습니다.
Ⅱ. 2025년에 그누보드를 사용할 건가?
그누보드는 개인적 활용을 전제로 한 웹 플랫폼 개발에는 여전히 유용하게 쓰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상업 프로젝트에 이를 활용하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오래된 툴인 만큼, 현대 웹 개발에서 일반적으로 전제되는 구조와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누보드는 PHP로 개발돼 있어, REST API 기반으로 프론트엔드와 백엔드를 분리하거나 외부 서비스와의 연계를 기본 전제로 한 애플리케이션을 개발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습니다. 계층 분리가 명확하지 않고 레거시 코드가 많이 누적돼 있어 유지보수성·확장성 측면에서도 한계가 분명합니다. 기본 제공 기능만으로는 상업 프로젝트에서 요구되는 보안 수준을 충족하기 어렵다는 점도 고려해야 합니다. 권한 관리, 입력값 검증, 로그 관리 등은 ‘알아서 안전하게 처리되는 영역’이 아니라 개발자가 직접 점검하고 보강해야 하는 영역입니다.
또한, 이미 정해진 구조 위에 기능을 덧붙이는 방식은 단기적으로는 빠를 수 있지만, 요구사항이 늘어나거나 수정이 반복될수록 전체 구조의 일관성을 유지하기 어렵습니다. 이러한 구조적 부채는 결국 유지보수 비용으로 돌아옵니다.
그래서 “그누보드로 몇 시간 안에 만들 수 있다.”는 말은 기술적으로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닐지 몰라도, 2025년에 지속적 운영을 전제로 한 프로젝트에 적용하는 것은 현실적이지 않습니다.
Ⅲ. 그누보드를 쓰더라도, ‘몇 시간 컷’은 성립하지 않는다
그누보드를 설치하고 게시판을 생성하는 것 자체는 몇 시간이면 충분합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실서비스 운영에 충분하지 않습니다.
웹 서비스를 운영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보안 장벽을 넘어야 합니다. 누가 어떤 권한으로 게시판을 관리하는지, 잘못된 형식의 데이터가 주입됐을 때 어떻게 방어하는지, 봇을 이용해 1초에 수십~수백 번의 요청을 보내 서버 부하를 유도하는 공격을 어떻게 방어할 것인지, 로그는 어떤 기준으로 남기고 어떻게 확인·관리할 것인지……. 그누보드는 이러한 것들까지 대신해주지 않습니다.
개발자가 가장 많은 시간을 쓰게 되는 부분은 게시판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게시판을 운영 가능한 상태로 만드는 과정입니다. ‘몇 시간 컷’이라는 표현은 게시판이 화면에 나타나는 시점만을 기준으로 한 말입니다. 하지만 상업 프로젝트는 기능이 동작하는 시점이 아니라, 문제가 발생해도 감당할 수 있는 상태로 제공되는지가 가장 중요합니다. 그 기준에서 봤을 때, 그누보드를 사용하든 그렇지 않든 게시판 기능 개발을 몇 시간 만에 끝낼 수 있다는 말은 현실적인 작업 단위를 설명하는 표현이 아닙니다.
Ⅳ. 그래서 이 발언이 불편했던 이유
이 글은 특정 기술의 우열을 따지기 위해 쓴 글이 아닙니다. 문제는 기술 그 자체가 아니라, 현실을 지나치게 단순화하는 방식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본래 질문은 “무리한 요구를 하는 고객을 응대한 적 있느냐?”였습니다. 저는 그 질문에 대해 요구사항의 범위와 책임의 무게를 설명함으로써 고객을 설득하고, 그 과정에서 어떤 판단을 했는지를 답했습니다. 하지만 “그누보드로 몇 시간 안에 만들 수 있지 않느냐?”는 말은 그 맥락을 기술 이름 하나로 지워버립니다. 그 순간 논의의 기준은 요구사항과 책임이 아니라, 속도와 손재주로 바뀝니다.
개발에서 중요한 것은 얼마나 빨리 화면을 띄울 수 있는가가 아니라, 어디까지 책임질 수 있는가입니다. 그리고 그 기준은 프로젝트의 성격과 맥락에 따라 달라집니다.
댓글 00